1.21 김신조 무장공비 사태 요점정리, 주민등록번호 탄생 비화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
사진은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의 모습. 총 31명이 서울에 침투했으나 그중 김신조 단 한사람만이 투항해 살아남았을뿐 도주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8명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1968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출처: 뉴스뱅크이미지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 개요
나무위키
대한민국에 주민등록번호가 생성되게 된 직접적인 사건이다.
참고로 박정희의 주민등록 뒷번호는 100001이며 육영수는 200002이다.
또한 영화 실미도로 알고 있는 684부대가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영화 실미도 초반부에 나오는 북한 공비들과의 교전이 이 1.21 사건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이다.
총 침투한 31명 중 사살 29명, 미확인 1명, 투항 1명(김신조 소위)의 전과를 올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김신조는 이튿날의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기자에게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밝혀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김신조 침투 경로
사진은 침투로 전체가 아닌 서울부분만 포함한 사진 - 나무위키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에게서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24 부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한다. 당시 1월 21일은 일요일로서 6.25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주기 위해 날짜를 계산하고 투입한 것이다.
17일
- 20:00 북방한계선 돌입
- 23:00 남방한계선 돌파
18일
- 02:00 임진강 북쪽에서 1숙영지를 편성.
- 21:00 1숙영지 출발
- 22:00 임진강 빙판위를 걸어서 도섭
19일
- 05:00 파평산 부근 삼봉산 능선에 2숙영지 편성
- 14:00 즈음 124 부대원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쳤고, 이에 북에 무전을 쳐서 어떻게 할 지를 물어봤으나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하여 다음의 이유를 들며 투표를 통해 살려주기로 결정했다.
1.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이유
2. 죄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이유
3. 우씨 형제 중 한 명이 거짓으로 김신조 일당을 인민해방을 위해 북에서 내려온 전사들이라며 환영하는 척했는데, 이에 넘어갔다는 이유
4. 어차피 작전은 금방 끝난다는 이유
이들은 나무꾼 형제를 살려주기로 하되,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북에서 큰 포상을 받게 해주겠다"라며 행로를 북으로 알려주고 풀어주었다.
바로 인근 파출소로 달려간 나무꾼들은 공비들을 신고하였고, 파출소에서 경찰서를 거쳐 미군과 국군에 통보되어 즉각적인 경계태세가 발령되었다. 국군은 유류품과 비트 잔여물을 확인함으로서 발언의 신뢰성을 확인하고 이를 이용하여 공비들의 행로를 추적, 이들이 서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미군 경계지역에 대한 작전권까지 이양받으며 신속하게 북한산과 서울시에 대규모의 병력을 배치한다. 또한 철도, 군 인사에 대한 암살 등 다대한 가능성에 대비하여 서울 시 외곽과 경복궁 등 요충지에 병력들을 긴급히 배정&증파하고 있었으나, 국군이 예상한 이동속도와 다르게 이들이 산악지형에서 무려 시간당 10km의 속도로 질주하여 차단선을 빠져나왔다.
- 19:00 나무꾼들을 풀어줌
- 21:00 공비들 2숙영지 출발. 나무꾼들이 파출소에 신고. 이 시점부터 대한민국의 대응시작
20일
- 02:00 국군 25사단 파평산 포위, 공비들은 국군의 대응을 예상하고 속도를 높임
- 09:00 비봉 북방 도착, 3숙영지 편성
- 21:00 3숙영지 출발
21일
- 05:00 비봉 동쪽에 4숙영지 편성
- 19:00 공비들 사복 환복 후 서울시내 돌입
- 21:55 이각현 서장이 발견
- 22:05 종로경찰서원이 검문실시, 이어 교전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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